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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할머니 생각
기기제조원
Canon
카메라모델
Canon EOS 5D
플래시
Flash did not fire, Auto
초점거리
68.0 mm
조리개변경
9/1
노출방식
Aperture priority
노출모드
Auto exposure
노출시간
1/250 sec
노출보정
-2/3
W/B
Manual white balance
ISO
320
촬영일자
2007:02:13 11:56:08

내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묻히신 곳 바로 위쪽의 양지바른 곳에 묻히신 할머니.

1966년 11월 11일에 돌아가신 내 할머니와는 특별한 인연인지 나는그때  2학년 11반 11번 초등학생이었다.


조선 후기의 엄청난 실학 사상가들을 숱하게 배출한 양반가문었지만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며 몰락한 양반집에

시집오셔서, 꿈을 잃고 술주정꾼이 되어버린 할아버지 때문에 모진 매와 학대를 받으며 고생을 하신 내 할머니...

백수에 술주정꾼이었던 할아버지께서 돈 벌어오라고 두 발을 할머니 어깨에 대고 쪽머릴 풀어 마구 잡아당기거나

매를 가하며 내몰곤 해서 새벽에 일본인 소유의 여관들을 전전하며 빨래와 아침식사를 해주시던, 일종의 파출부로

일하셔야 했던 내 할머니는 젊은 시절 장터에서 배추잎을 주워와서 김치를 담가야 할 정도로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

어린 시절 내 아버지는 늘 밥을 굶으셨고, 할아버지께서 동네사람들을 끌고와 밥과 술, 안주를 즐기는 모습을 보다가 

"어른들 노는데 버르장머리 없게 알짱거린다"는 야단을 맞으면, "우리는 커서 꼭 곤쟁이젓과 멸치로 반찬 해먹을 수

있도록 성공하자"고 형제들과 성공을 다짐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할머니가 꾸려가는 생계의 형편이 어떠했으랴...   


모진 고생을 이겨내면서 큰 아들을 사업가로, 둘째 삼촌을 일제 강점기에는 엄청난 형량인 7년형을 언도받아 6년 반의

옥고 끝에 돌아가셨지만 훌륭한 독립투사로 키우셨고(둘째 삼촌의 부하가 해방공간에서 황해도 도지사가 되었을 정도로

둘째 삼촌은 대단한 분이셨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나름대로는 문화계를 대표하는 미술대학 교수로 키우셨고, 막내 삼촌을

대구사범에 보내 문경에서 교사로 키워내셨다(6.25  때 자원입대하여 향로봉 전투의 선봉에서 소대장으로 싸워 대대병력을

이겨내고 후에 부상에서 회복되자 다시 김화 전투에 자진 참여하여 산화하셔서 우리 반공도덕 교과서에 실리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고생을 달고 다니셨던 할머니가 불쌍해서 초등학교 1-2학년 어린 나이에 여관을 같이 다니면서 깡충 뛰어 폄푸질을

하며 물을 퍼 할머니를 도와드리곤 하셨단다... 명지대학 교수를 지내시다가 안양 성결대학을 세운 아버지이 친구분으로부터

"네 아버지는 전교 일등이 단골이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연대장이어서 말을 타고 학생들 선두에 서셨던 분이야"라고 말씀해

주셨던 날, 정작 내 아버지께서는 친구들이 가신 뒤, "사실은 국방생 교복을 사입을 돈이 없어서 할머니께서 일터에서 수재비를

만들어주고 남은  밀가루 푸대로 재단해서 만든 교복을 해 입고 학교에 다녔단다"라는 말씀을 하셨다...흰 밀가루 푸대 복장으로

칼을 차고 연대장 말을 타고 계신 낡은 사진을 보여주시며 고생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던 아버지는 "양말에 큰 구멍이 나서

교장선생님께 상을 타러 나갈 때에는 구멍난 부분의 살에  먹물을 칠해서 감추기도 했다."며 눈물을 흘리시곤 하셨지민 그 사진을

보여주실 때는 "사실 이게 밀가루 푸대 옷이지만 멀리서 보면 말 탄 모습이 그래도 멋있게 보였어. 남들은 다 국방색 옷인데 나만

흰 색이니까"라고 눈물 끝에 웃음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적산가옥을 제외하면 이층집이 없던 시절, 서울에서 거의 처음으로 현대식 이층집을 짓고 마국 홀리요크에 기름보일러를 주문해서

설치하여 할머니에게 선물하시고는 지하수를 펌푸로 끌어서  우리에게 작지 않은 수영장(중학교 때는 작아서 메워버렸다)을 만들어

주셨던 아버지께서 새집으로 입주하여 할머니를 모신 날,.. 할머니는 평안도 사투리로 "됴선 천지래 우리집이 뎨일이디?" 하시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던 모습이 웬양의 할머니를 보면서 기억에 떠올랐다..  


장호원 대지주의 딸로 일제때 숙명여학교와 공주사범을 나오신 내 어머니는 할머니께서 시장에서 배추잎사귀를 얻어오시면 "어머니,

제발 남 부끄러운 일좀 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시곤 했지만, 외가에서는 "가난한 집에 보낼 수 없다."고 결혼식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너는 몸만 와도 된다."며 둘째 며느리를 맞이하셨던 할머니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웬양의 외진 산골마을, 니우자오짜이 장터에서 야채를 팔던 할머니를 보니 주름이 얼굴에 가득하시던 부드러운 미소의 내 할머니 생각이

마구마구 일어났다. 눈가에 미소를 지으며 힘들게 업어주곤 하시던 굽은 할머니의 등판, 그 위에서 마구 손발을 휘젓으며 설쳐대고 날뛰던 

철없던 모습의 나, 그리고 "얘, 할머니 힘드시니까 제발 좀 내려와라."라고 하시던 아버지...


내가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던 할머니표 자장가는 아버지표 자장가이기도 했다.

그 가사가 너무 특이해서 후에는 민망하게 생각되었던 우리집 자장가는 리듬도 독특했다.


자↘~지↗, 자지~^야~! 

자^아~↘지~, 자지~^야_

잘도오~ 잔다~↗,  자지^~야~! 

우~리↗ 자지^~야~! 


물끄러미 장터의 야채장사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옛 생각을 떠올리며 그 할머니(첫째 사진)에게서 채소를 몽땅 사서는(그래야 우리돈 2,000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머물던 숙소의 바이쥔(白君)에게 건네주자 그는 "왜 귀찮게 이걸 다 사느냐?"고 짜증을 부렸다.

그렇지만 "고마워, 정말 고마워"(感謝, 非常感謝)라는 이 할머니 말씀을 뒤로 하고 발길 돌리면서 나는 마치 내 할머니께서 내게 전해주는 고마움의

표시처럼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80세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는 주름이 거의 없으셨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할머니가 되셨다. 주름이 많으셨던 할머니와 달리, 성장기에

너무 유복한 집에서 자라셔서 주름이 없으셨던 내 어머니도 돌아가실 무렵에는 주름은 별로 없으셨지만 그래도 완연하게 할머니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터에서 만나곤 하는 주름진 할머니들은 내 할머니와 돌아가실 무렵의 내 어머니로 치환이 되고 연상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시 내 유년기로 연상작용을 일으켜 내 가족사와 돌아가신 분들의 생애를 되새기게 해준다.

이제는 모두가 그립고 정말 그리운 분들이다

                                                                                                                               牛角寨  @  元陽縣, 中國 雲南省

사진가
박희(朴希)
제목
할머니 생각
조회
1,413
추천
0
날짜
2020.09.17 00: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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